부산야행소개
피란수도 부산 소개
“우리가 지켜내고 기억해야할 1023일의 역사, 피란수도 부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던 대한민국은 전쟁 개시 며칠 만에 국토의 절반 이상을 내어주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긴박한 전황 속에서 대전과 대구를 거쳐, 1950년 8월 18일 정부는 최종적으로 부산을 피란수도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울로 환도하기 전까지 부산은 대한민국의 피란수도로서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피란민의 안식처였습니다.
항구도시로서 여러 국제기관과의 긴밀한 협력 및 유엔군과 유엔구호물자 지원이 가능했던 부산은, 바다를 접한 국토의 동남쪽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상 정부기능을 온전히 유지하고 전쟁 중 피란민들을 보호하기에 최적의 도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고 국제사회와 당시 피란정부, 국민들 모두의 노력으로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1023일간의 아픔과 희망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현재까지 우리의 일상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부산광역시는 2015년부터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추진중이며, 202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이후 2028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을 알아가고 지켜가는 것은 부산,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과정입니다.
경무대 (현. 임시수도기념관)
“고난의 극복과 전쟁의 회복을 담은 역사, 경무대.”
1926년 조선총독부가 경상남도 도지사 관사로 만든 이 곳은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이 피란수도가 되면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1950년 9.28 수복으로 잠시 서울로 환도했던 기간을 제외하고, 1953년 8월 15일까지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서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대통령이 생활과 집무를 보며 정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종전 후 1983년 경상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한 뒤 부산시에서 건물을 인수하였고, 1984년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단장하여 임시수도 관련 유물과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치의 최종 결정과 대외적인 외교업무가 이루어진 장소라는 점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대통령의 집무실과 응접실 등이 당시 그대로 재현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임시중앙청 (현. 동아대 석당박물관)
“피란수도 부산을 이끈 국가의 심장부, 임시중앙청”
1925년 완공되어 경남도청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이 피란수도가 된 후 1953년 서울로 환도될 때까지 약 3년여 동안 정부청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종전 후 다시 경남도청의 자리를 되찾았다가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자 1984년부터 2001년까지는 부산지방검찰청 청사로 이용되었으며, 2002년 동아대학교가 자리하면서 이후 현재까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은 국가적 보물, 민속문화유산,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등 다양하고 진귀한 유물 30,000여점을 소장하고 있어 부산에서 가장 많은 국가지정유산을 보유한 곳이며, 소장품들 의 수준과 가치가 매우 뛰어나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석당박물관으로 수리·복원될 당시 기존 벽체를 그대로 보존하며 최소한의 보수를 거쳤는데, 이 벽체들은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흔적들로 역사적 기억을 담는 공간임과 동시에 현재는 지역문화시설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관상대 (현. 부산기상관측소)
“군사기능과 피란민들의 생업 지킴이, 국립중앙관상대”
일제강점기 1904년 ‘부산측후소’로 보수동에 창설된 국립중앙관상대는, 1934년 현재 위치인 복병산으로 이전·신축되었습니다. 피란수도 당시 매일 1시간마다 24회 기상관측을 하고 기상정보를 발표해주었던 곳으로, 군사 작전 지원 외에도 부산으로 피란 온 어민과 시민들이 생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중요한 기상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1981년 부산지방기상대로 개칭, 1992년 부산지방기상청으로 승격된 후 청사가 동래구 명륜동으로 이전하였지만, 현재까지도 기상관측 업무는 이어오고 있습니다.
해양도시인 부산을 상징하는 배 모양으로 고안된 관측소 건물은 근대기에 도입된 표현주의 건축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고, 기상청이 생긴 지 100년에 가깝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념적인 가치 이상의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가치로 2001년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 세계기상기구(WMO)에서 주관하는 ‘100년 관측소’에 선정되었습니다.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 (현.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과거와 현대·미래의 역사가 함께 흐르는 곳, 미국대사관”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은 부산을 대표하는 근현대사 전문 기관으로, 격동의 근현대 역사를 통해 오늘날 부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해방 이후 부산에 주둔하던 미군들의 숙소로 이용되다가, 1949년 미국대사관 및 공보원으로 개원하였으며, 이후에는 미문화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부산 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 요구 끝에 1999년에 미문화원이 철수하자 부산시가 인수하여 2003년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되었고 이후 2023년 박물관·도서관·기록관이 조화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여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시민들에게 돌아왔습니다.
1920년대에 세워진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서구 양식이 도입될 당시의 건축 경향을 살필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료 중 하나입니다.
부산항 제1부두
“100만 피란민과 국제원조의 관문, 부산항 제 1부두”
부산항 제1부두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준공되었으며,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 일제가 항만과 철도 노선을 연결하여 대륙 침략의 거점이자 식민지 수탈품의 수송로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한 무역 항만시설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귀환동포들의 귀국로로, 피란수도 당시에는 유엔군을 비롯하여 상당한 군수물자, 구호품, 생필품 등을 하역하고 보급하는 후방 병참기지로서 우리에게 생명줄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피란민들에게는 삶을 이어갈 일터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피란민들이 폭증하는 가운데 북한은 부산항의 기능을 마비시키려 집요하게 테러를 시도했으나, 조직적으로 잘 운영된 부산항은 전력 증강과 군수 보급기지로서 후방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산업 발전기에는 수많은 무역의 거점이자 수출입 기지로 활용되었으며 늘어난 물류량을 감당하기 위해 1975년부터 1977년까지 개축 공사를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 부산광역시 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원형보존되고 있으며, 향후 역사공원으로 정비되어 시민들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하야리아기지 (현. 부산시민공원)
“부산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하야리아 기지”
1930년 일제가 경마장으로 설립한 부산 경마 구락부였던 이곳은,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 군의 군수창고 및 외국인 포로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야리아 기지는 유엔 한국 위원회, 유엔 한국 재건단 본부, 유엔군 훈련소 등 유엔의 정치, 경제, 군사 기구들이 주둔한 복합 기지로 활용되었습니다. 하야리아 기지 주변의 주민들은 미군 부대로 인해 반세기 이상 생활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부산 시민들은 때로는 옥고를 치러야 하는 고난도 감수하였습니다. 1995년 '하야리아 땅 되찾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2010년 1월 27일 부산시청에서 주한 미군의 기지였던 캠프 하야리아의 부지를 반환받아 지금의 시민공원이 조성될 수 있었습니다. 공원 역사관으로 이용 중인 하야리아 기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당시 장교 클럽(식당)은 부산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유엔묘지 (현.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평화의 숭고한 상징, 유엔묘지”
유엔기념공원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유엔군의 안식처로, 1951년 4월 유엔군사령부에서 조성한 묘지입니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로,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친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전쟁 중 전국 각지에 가매장되어 있던 유엔군 전사자 약 11,000여 명의 유해는 신원 확인을 거쳐, 확인된 유해는 유엔기념공원에 임시로 안장된 후 배를 통해 본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는 일본 요코하마로 보내 정밀 확인을 거친 다음 유엔기념공원으로 다시 수송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현재는 한국 카투사를 포함해 11개국의 2,300여 구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유엔과 세계 협력을 통해 지켜낸 평화의 상징이자 희생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평화의 장소입니다.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현. 우암동 소막마을)
“피란민들의 간절한 보금자리,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일제강점기 일제는 조선의 소를 수탈하기 위해 검역소와 소막사를 설치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우암동에는 소막사와 천막 등으로 구성된 피란민 수용소가 설치되었으나, 급증한 피란민들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대규모 공간을 형성할 수 있는 소막사는 기존 용도와 관계없이 대규모 피란민 거주전용이 되었습니다.
소막사를 개조하고 분할하여 생활공간으로 조성한 독특한 주거 공간은 피란 시절 빈 막사에서 하루하루를 버틴 피란민들의 애환이 묻어나는 곳입니다. 전쟁 이후, 1960년대에 우암동 소막마을은 주변에 주요 공업시설들이 자리하면서 귀환동포나 피란민이 아닌 인근 공장의 노동자들이 생활하기 위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였습니다.
2023년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일대에 개소한 ‘우암동 소막마을주택’ 전시관은 그 당시 생활모습을 복원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전시관 인근 일대의 주택들은 소막사의 원형 틀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의 골목길과 우물 등 피란 당시의 모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현.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들의 절박한 생존의지,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1876년 개항 후 부산에 급증한 일본 거류민들로 인해 아미동 일대에는 일본인 공동묘지가 생성되었습니다. 건축재가 없던 피란민들은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이 묘지의 비석을 주춧돌 삼아 임시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산 자의 주택'과 '죽은 자의 묘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부산으로 온 피란민들의 급박했던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골목 사이사이 각진 모양의 상석이나 비석이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이렇게 형성된 주거지들의 건축자재, 계단, 담벼락 등에는 여전히 그 당시의 비석 모양을 발견할 수 있어서 비석마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집을 세우며 수습한 유골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근처 절에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까지도 망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는 고단한 삶의 흔적이 담긴 곳으로, 지금은 아름다운 비석문화마을로 재탄생한 과정까지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